그런 날 있었으면
언젠가 하루쯤 그런 날 있었으면 좋겠다
스치듯 우연히 너와 마주쳐
어떻게 지내느냐 따위의
상투적 질문 같은 건 그만두고
그냥 대답이 필요 없는 한마디
나를 사랑하긴 했었느냐고 물은 뒤
돌아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날 하루에 이런 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몰래 그 모습을 영화처럼 찍어주어서
옛사랑과 재회하는 내 모습을
관객이 되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아무리 감동적일지라도
지나간 사랑은
비디오 가게 구석에서 먼지를 듬뿍 뒤집어쓴
빛바랜 테이프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남은 날들 동안
또다시 사랑 따위로 요동치는 순간이 오면
그 낡은 영화를 보면서
사랑이란 게 흐르는 물과 같아서
처음에는 제 나름의 이유로
굽이치는 골짜기를 돌아 폭포로 쏟아지며 흐르다가도
종내는 저 바다라는 곳에 이르러
형체도 없이 흩어지는 것임을 되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전유경 시집, 잎처럼 흩어지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