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꽃 비가 내리더니, 어느덧, 향긋한 아카시아향이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하게 어릴 적 향수를 안고 날아오네요.
아줌마닷컴 사이버작가, 블로거로 활동하시는 비단모래(본명:이현옥)님은 현재 대전MBC 방송구성작가로, 대학의 출강까지 1인 다역을 소화하고 계시면서 최근 “사랑으로 길을 내다” “사랑은 날것일 때 맛있다”라는 시집을 출간하여, 고이고이 품고 있던 사모곡을 한올한올 풀어내어 이 봄, 독자의 감성지수를 끝없이 흔들어 놓고 계십니다.
언제나처럼 늘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던 부모님
울긋불긋 화려한 꽃 잔치에 함께 하지 못해 가슴속에 깊이깊이 간직할 수 밖에 없기에 더욱 그립습니다.
부모님의 지극정성으로 성장하여 당당한 사회인이 되기까지 부모님의 허리가 휘고, 주름에 주름을 얹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부모가 되어서야 내 부모의 그 삶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까요?
작가님들이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자식을 잉태하고 낳는 고통을 한번 더 겪는다고 표현하죠.
이현옥님의 출간을 축하하면서 비단모래(錦沙)…닉네임처럼 이 봄이 가기 전에 활짝 핀 동백꽃 같은 미소가 인상적인 그녀를 만났습니다.
사랑으로 길을 내다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中에서
(중략)
오늘 또 연탄은 꺼졌다
엄마 무릎 뼈를 넣고 불을 살랐다
엄마가 연탄 한 장 사기 위해
삼천 냉방 같은 방 구들을 덥히기 위해
진골 빠진 엄마 다리는 연탄처럼 까맣게 졸아들었고
화깃내가 진동했다.
건강하시지요?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A 먼저 너무도 평범한 저를 아줌마 위인전에 선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방송일 열심히 하고 강의 열심히 하고 또 배우고 있는 것 열심히 하면서 신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많이 행복합니다. 아줌마 닷컴에서 북 이벤트까지 해주셔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머니께 마음속으로 더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게 다 어머니 덕이니까요.
Q 그 동안 많은 책을 출간 하신 걸로 아는데, 가장 애착이 가거나 개인적으로 특별한 책이 있으실까요?
이번에 출간하신 “사랑으로 길을 내다”에 대해 잠깐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A 책을 여덟 권을 냈는데요. 아무래도 책을 낸다는 것은 자신을 다 보여야 하는 작업이라서 제 아이들처럼 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작은 아이를 여덟 번 수술 시키면서 엄마로써 감당 할 수 없는 아픔을 털어놓았던 첫 번째 시집 ‘아이야, 우리 별 따러 가자’라는 책이 늘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남편이 10여 년 간 매달 첫날이면 메일편지를 보내주는데요
결혼 25주년 은혼식에 남편의 마음을 모아 낸 ‘내 안에 그대가 있네’ 책도 마음 따뜻하게 합니다.
‘사랑으로 길을 내다’는 저를 기르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신의 몸...사후신체까지 병원에 기증하시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특별한 (아버지도 현재 기증해 두셨습니다)
교훈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은 책입니다. 더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세월이 가면서 많이 잊어 갔습니다. 그래서 더 잊기 전에 모아보자고 모아봤는데요.
어머님이 늘 타이르시던 말씀, 아버지께서 자식위해 기도하시던 말씀
그리고 시어머님의 사랑...결국 그분들의 사랑이 길을 내어 그 길을 걷게 됨에
감사한 마음을 적은 책입니다.
Q 책 내용 중에도 부모님의 자식사랑이나 교육관이 분명하신 걸로 표현을 많이 해 주셨는데, 결혼을 하시고, 자녀를 키우면서 내 부모님의 교육관이나 자식사랑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현옥님의 자식사랑법이나, 특별교육법이 있으신가요?
A 네..항상 부모님께서 좋은 말, 정성스런 말을 하라고 가르치셨는데요.
말씀언(言) 변에 이룰성(成)자가 정성성(誠) 자라고 좋은 말은 바로 좋은 기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교회나 절에 가서 하는 기도도 좋은 말로 간구하는 것이니 항상 따뜻하고 좋은 말을 쓰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에
저도 제 아이들에게 항상 좋은 말을 하라고 가르치게 됐습니다. 또 어머니는 살강밑의 놋수저를 팔아서라도 소풍이나 밖엘 다녀올 때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라고 가르치셔서 저도 제 아이에게 그걸 가르쳤더니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 소주 한 병 엄마 동생 요구르트를 사왔더군요. 칭찬해주고 즐거워 해주니 계속해왔는데 청소년에게 주류 판매 금지가 되어 학생 때는 잠시 못했습니다.
그 후 아이들이 자신들이 먹을 빵을 살 때도 엄마 좋아하는 단팥빵을 사서 식탁에 놓아주고 자신들이 먹을 과자를 살 때도 엄마 좋아하는 과자 한 봉을 사서 줄때 별거 아닌데도 마음이 기쁩니다. 효도 습관이 되어야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두 아들이 다 결혼해서 마음껏 표현하고 살고 있어서 좋습니다.
특별한 교육이라기보다는 아이들 앞에서 부부가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했고요, 부부간에 서로 상처 되는 말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이 잘하는 것은 아빠 닮아서 그렇다고 했고 남편은 아이들이 엄마 닮아서
그렇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늘 좋은 말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저를 그렇게 기르셨듯이 항상 말조심을 많이 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참 잘 웃으셨습니다. 선비의 아내로 온갖 고생 다하셨는데도 항상 우리를 보고 웃으셨습니다. 그러며 “니들은 다 잘 될 거다” 라고 긍정과 칭찬을 아끼자 않으셨습니다. 칭찬의 힘입니다.
아버지는 제게 금사 비단금(錦)모래사(沙)라는 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풀면 비단모래지요. 비단모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흡수하고 포용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살라고 지어주셨는데..
그러나 저는 제 부모님처럼은 다 못한 것 같습니다.
Q 옛날 우리 부모님 세대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자식을 양육하던 세대라면 요즘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이현옥님은 어떤 세대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저는 어머니 세대와는 좀 달랐습니다. 큰아이 6학년 때부터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는데요. 밖에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집안일에 신경을 좀 덜 쓰게 되더군요. 엄마는 슈퍼우먼이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뒀습니다. 운동화도 빨아 신고 체육복도 빨고 밥 차려먹고...준비물도 스스로 챙기게 내버려 뒀습니다. 다행이 아이들이 조금 자라서 일을 하게 돼 저는 그나마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너희도 열심히 살아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고등학교 때 하루에 피자 판을 300개를 닦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큰아이는 대학시험 치르고 치킨배달을 하게 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대학 다닐 때 저와 남편도 대학을 다니게 되어 네 식구가 모두 학생일 때가 있었습니다. 학비도 각자 스스로 하자고 했더니 작은아이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지금까지 갚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좀 미안해서 엄마 아빠 공부하느라 너희들 고생시켰다고 말하자 ‘엄마 아빠 그 모습에서 더 힘을 얻었다’는 말을 해줘서 조금 미안함을 덜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늦게 공부한 것에 자부심이 참 크더군요.
돈은 물려주지 못했어도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여줘서 참 좋습니다.
Q 가족사랑이 남다르셨던 부모님과 형제 많은 집안의 맏며느리로서의 삶도 만만치는 않으셨으리라 짐작을 하는데요 ㅎㅎ 부모님의 공경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심에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이현옥님의 삶에 있어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현명하게 이끔을 가능케 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A 저는 잘… 못했습니다. 다만 저희 시어머님께서 정말 지극히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저희 시어머님은 동네가 유명할 정도로 시집살이를 하셨는데요. 정서의 대물림 이란 것이 있는데 저희 시어머님은 그 대물림을 과감히 끊으시고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8남매 맏며느리 짐은 참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시아버님께서 이미 효자 상을 타신 분이고 제 남편 역시도 그 부모님 슬하에서 장남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 가슴이 좀 넉넉해서 제 허물을 많이 덮어 주었습니다. 그저 우리 며느리 잘한다 하셔서 잘하려고 노력은 했는데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도시 며느리
농촌 며느리로는 적합지 않은데요. 늘 이해하며 봐주셨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세상을 떠난 아랫동서가 역할을 잘해주었습니다.
‘동서...집에 이런 일이 있는데 해야 겠어“ 라고 저는 말만 하면 동서는 항상 ‘알았어..형님’ 이었습니다. 그러며 전국에 있는 8남매에게 연락하고 모으는 일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서가 암으로 저와 이별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동서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 동서가 유언할 때 “형님..나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 동서 덕분에도 형제들과 잘 지낼 수 있었고요.
어떤 행사를 치르고 배분 할 때는 저는 우선 동생들부터 했습니다. 그러니까 불만이 없더군요. 또 가능한 경제적인 면에서 맏이인 제가 부담을 조금이라도 더 지려했습니다.
그랬더니 집안일을 할 때 불화가 생가지 않았습니다.
그걸 남편이 많이 인정해 줍니다. 그건 제가 생각해도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그럴거고요.
Q 시인을 비롯하여 방송작가, 대학강사 활동을 비롯 독서지도사, 노인요양보호사, 효지도사 등 수많은 이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정말 놀라울 따름인데요~
공부의 욕심이 많으셨던건지요? 그만큼 가족들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A 참 하고 싶었던 공부였지만...중학교부터 그 꿈을 접어야 했었습니다.
가난한 선비의 집안이어서 장학금이 아니면 공부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울로 고등학교를 간 큰오빠가 “가난을 이기는 길은 공부하는 길밖에 없다”고
어려워도 공부는 꼭 하라고 늘 격려했습니다.
그러다 일찍 결혼했고 8남매 맏며느리의 짐도 만만치 않았고
작은 아이가 13년간 수술을 받고 하면서 공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방송작가가 되었지만 정말 학력에 대한 마음아픔이 컸습니다.
그러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마흔 중반에 남편과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남편도 대학교를 졸업했고 저는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정말 즐겁게 공부했습니다. 우선 친정부모님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드릴 수 있어서 좋았고 친정 6남매 중 저만 못한 공부를 하니 형제들도 마음의 짐을 벗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공부를 시작하자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 이것저것 하게 됐습니다.
몇 년간 저녁시간은 자격증 공부를 병행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가족들의 응원 없이는 이룰 수 없었는데요..
일단 밥이나 살림의 무게를 덜어줬고요.
두 아들의 응원과 남편의 응원으로 이뤄냈습니다.
Q 무한손주사랑을 보여주고 계시던데, 사랑하는 가족들 소개를 부탁 드릴게요~
A 저는 올해로 결혼 33년째 됩니다. 2011년 12월 말, 30여년 다닌 직장을 퇴직한 남편이 지금은 자신의 꿈을 이룬 가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피알 좀 할까요? 예명은 지중해입니다. 곡목은 “여보 정말 미안해”라는 노래로 1집을 냈고 2집은 “고마운 당신”으로 냈습니다.
8남매 맏며느리로 고단한 집을 진 아내에 대한 마음을 노래로 부르는데 정말 잘 부릅니다. 중학교 때 가수가 꿈이었다고 하는데 8남매 장남이고 또 아픈 아이를 기르며 꿈을 접고 사는 남편이 늦게 공부해 대학을 졸업하는 해 제가 남편에게 꿈을 이를 수 있는 앨범 제작을 했습니다. 제가 과감하게 투자를 한 거죠.*^^*저로서는 거금 들었습니다.
하지만 퇴직 후 제 2의 인생을 즐겁게 사는 남편을 보면서 꿈을 이뤄주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부사랑 전도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행복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가 2년 전에 손목 수술을 한 후(현재 왼쪽 엄지손가락이 부자연스러워 그릇을 마음대로 잡지 못해 설거지를 못합니다) 그때부터 살림까지 맡아 지금은 전업주부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30년 밥을 해줬으니 앞으로 30년은 남편이 밥을 해주겠다고 합니다. 제 밥은 꼭 현미밥을 해주는 데요. 이젠 살림도 베테랑이 되어갑니다.
여덟 번 수술한 둘째가 먼저 결혼을 했습니다. 후후..학생 때 첫 손녀를 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덟 번의 수술을 한 아들에게서 손녀가 생기니 감격하게 됐습니다.
수술을 여러 번 하느라 방사선을 많이 찍어 결혼 전에 실은 남성적..그러니까 임신가능성이 있는지 검사해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도 수술을 많이 해서요.
그래서 늘 걱정이 되었었고 작은아들 때문에 많이 울었는데요. 갑작스레 생긴 손녀가 웃게 만들더군요.
아들과 며느리가 둘 다 학생이라 한집에서 2년을 같이 살아 손녀를 한 침대서 같이 재우며 길렀습니다. 그래서 정도 많이 들고요.
작은아이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안양 병원에 남자 간호사로 취업되어 살림을 내면서 손녀와 헤어지게 돼 처음엔 많이 허전했습니다. 다행이 이사하고도 한동안은 매주 손녀를 데리고 내려와 줘서 고마웠습니다. 아들만 기르다 며느리가 생기니 정말 이뻤고 거기에 손녀가 생기니 참 신기했습니다. 작은아이가 손녀하나를 더 낳았고요. 큰아들도 결혼해서 만 3년 만에 손녀를 낳았습니다. 다행이 큰 아들은 저희 아파트 뒷동에 살아서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아이들..자신들의 집 비밀번호를 우리 집과 같이 해놓았습니다.
아마 이런 며느리들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언제든 집처럼 번호 누르고 오라는 뜻인데요. 그 마음이 참 따뜻합니다. 고맙고요. 요즘 며느리들 하고 걱정 하는데요.
요즘 며느리들이 저희 때 보다 더 현명하고 똑똑한 것 같습니다.
배려할 줄 알고요. 큰며느리 작은 며느리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Q 아줌마닷컴과의 인연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시는지요?
5월31일 제13회 아줌마의 날을 맞아 <엄마의 힘!>이란 주제로 회원님들과 만남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현옥님이 보시는 <엄마의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아마 한 오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아줌마의 일상을 쓰고 있습니다.
아줌마...우리나라의 힘은 아줌마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게 아닐까요?
자녀에 대한 남다른 교육열로 우리나라를 발전시키게 했고요..2002년 월드컵때 ‘
축구를 모르던 아줌마들이 주걱과 국자를 듣고 응원했던 것을 기억하는데요.
아줌마의 힘을 합하면 못 이룰게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 아줌마들은 한다면 하니까요.
특히 우리나라 아줌마들은 열정이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특히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바치는 힘이 있습니다. 엄마의 힘은 지치지 않는 열정입니다.
Q 곤란한 질문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여자의 인생으로 볼 때 이현옥님의 삶의 만족도를 여쭤봐도 될까요^^
또, 사회활동에서는 충분히 인정을 받고 계신데요~
가족들에게 자주 해 주시는 엄마표 대표요리가 있으신지요?
주부로서 또는 엄마로서의 점수를 직접 주신다면 몇 점이나 주실 수 있을까요^^
A 어렸을 땐 공부하는 오빠들보고 여자라 좀 피해를 보는 구나도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오빠들은 다 멀 리가 좋아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고 저는 장학금을 받을 처지는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친정에서도 아버지께서 아들보다는 딸을 사랑하셔서 여자로써 고생스러운 건 있었어도 불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 나고 나서는 오히려 더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남편에게 여자가 왜 이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손이 아프지 않았을 때는 아이들이 엄마 표 닭볶음탕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큰아들은 엄마 표 닭볶음탕과 대파 많이 넣고 끓여주는 육개장.. 그리고 집고추장을 넣고 끓이는 추어탕은 어디 유명한 맛 집도 못 따라 온다고 합니다. 큰며느리였으니 음식도 많이 했는데요.
지금은 두 식구 살다보니 음식 솜씨도 줄고 남편이 전업으로 주부역할을 하다 보니
좀 그렇습니다. 간간 마음 내키면 나물 무쳐주고 된장 끓여주면 남편이 감격합니다.
엄마점수는 70점...하하...너무 깎았나..아들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남편은 제게 점수가 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하..왜냐하면 저를 늘 이쁜마누라 라고 부르니까요.
여보..자기가 생각하는 내 점수는 몇 점이야? 하고 물었더니요.
그야 백점이지...합니다. 근데 좀 민망하네요. 불량주부라서요.
그래도 결혼 30여 년 간 8남매 맏며느리로 열심히 살고 있으니
어지간히 점수는 얻을 수 있을 겁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한데요^^
A 글쎄요. 방송작가 생활도 올해로 20년이 넘었네요.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즐겁게 할 거고요.
시를 쓰는 사람이니 좋은 시한 편 남기는 일도 열심히 해야 하고요.
58년생이니 쉰다섯이네요.
오년 후 쯤 환갑이 되면 다시 시집 한권을 내려고 합니다. 손녀들에게 시낭송도 해주고 남편과 간간 여행도 하고..아 시아버님 계시니 시아버님 잘 모시고요. 친정아버지께도 마음 많이 써야겠지요. 그냥 잔잔히 나이 들고 싶습니다. 손녀가 좀 자라면 손녀와 기차여행도 하고 싶고요. 아줌마닷컴에 제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올리는 것도 바람입니다.
Q 바쁘신 와중에 오랜 시간 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끝으로 대한민국 아줌마로서 후배에게 특히, 아줌마닷컴 후배에게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응원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A 대다수는 어려움을 장애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있으면 장애물이 목표물이 되겠네요. 아줌마 닷컴에서 활동하는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행복해 지기를 바라고요. 그러나 결국 행복도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가 손에 쥐어 주는 게 아니라서요.
참 어려운 일 많아서 불편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꿈이 있었으니까요. 시작하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행복해지기 시작했고요.
꿈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산과 꿈은 펼쳐야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탁은 아줌마가 건강해야, 아내가 건강해야, 엄마야 건강해야 아름다운 가정을 꾸밀 수 있습니다. 제가 아쉬운 게 있다면 건강을 많이 놓친겁니다. 네 번 정도 수술 했으니까요.
건강도 좋지 않았고 아이도 아팠고 공부도 다하지 못했고 가난한 8남매 장남의
맏며느리 이야기...그냥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도 제 마음에 새긴 주문 ‘오늘은 좋은 날, 내일은 더 좋은 날’을 믿습니다.
아내는 시를 쓰고, 남편은 노래를 하고…
그녀의 온화한 사랑은 곧 ‘시’가 되고,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던 삶은 ‘에세이’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걸어온 길은 이미 숱한 그녀의 발자국으로 굳고 또 굳어져서 이제는 그녀의 가족들과 자손들이 조금은 쉽게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이 있어 행복했다는 이현옥님
자신은 물론이며, 가족에게로까지 그 꿈을 함께 펼칠 수 있는 희망을 전하고, 기둥이 되어 주셨고, 부모님의 사랑과 교육을 그대로 자식에게 실천을 하셨기에, 지금의 그녀가 더욱 당당하고, 힘있는 대한민국의 아줌마로 거듭나셨으리라 믿습니다.
긴 시간 동안 바쁘신 시간 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아줌마닷컴의 선배 작가님으로 또, 언제까지나 행복한 시인으로 계셔주시길 바랍니다.
* 저서
데뷔작 ‘아이야 우리 별 따러 가자’ (분지,1991년)
'친정아버지' (분지,1992년)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분지,1995년)
'아름다운 동행' (분지,2002년)
'읍내동 연가' (분지,2002년)
'내안에 그대가 있네' (문학의힘, 2005년)
‘사랑으로 길을 내다’ ‘사랑은 날것일 때 맛있다’ (분지,2012년)
* 비단모래님 블로그
http://blog.azoomma.com/zblog_lib/view.html?BLOG_ID=silkjewel&log_no=285407
인터뷰진행 아줌마닷컴 남은주(namsunyeo@inuscom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