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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아들과 특별한 행복을 가꾸어가는 한연희 아줌마


BY 아줌마닷컴 2000-11-24

이번 왕아줌마는 한국입양홍보회 한국지부 공동회장을 맡고 있는 한연희 아줌마입니다.

한연희님은 첫아이를 낳고 몇 달도 되지 않아 불임수술을 하였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입양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두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한국의 입양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모질고 대단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토록 원했던 입양을 해 그 아이를 반듯한 사춘기 소년으로 성장시켰고, 재작년엔 6개월 된 아이도 입양해 육아일기까지 쓰고 있습니다.

한연희님의 집에는 입양한 두 아이 외에도 돌보는 아이가 둘 더 있습니다.

 

Q.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먼저 본인과 가족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안녕하세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57년 닭띠 한연희고 제 남편은 저보다 한 살 많은 유연길, 유일하게 제가 낳은 81년생 유명곤, 첫 번째 입양자녀 84년생 유희곤은 90년 4월8일에 둘째아들이 되었고 97년12월생 유하선은 98년6월22일에 셋째아들이 되었고 91년.92년생 영범이랑 영환이는 99년 12월28일부터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일곱 식구 중 제가 유일한 여자이고 모두 남자죠. 그리고 우리 가족은 모두 다른 엄마한테서 태어났고 영범이랑 영환이만 엄마가 같습니다.

특징이라면 우리 가족은 모든 혈액형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B형, 저는 A형, 큰아들은 AB형, 둘째아들은 A형, 셋째아들은 O형, 중간의 두 아들은 B형,A형으로 다양하죠.  
  
  
Q. 한국에서의 입양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는데요, 처음 입양을 생각한 것이 언제부터 인지요?
  
A. 지금의 제 남편이 청혼을 하면서부터 입니다.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신앙적인 동기에 의해 결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입양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혼하는 남자에게 결혼약속으로 입양을 허락하겠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결혼할 욕심에 별 생각 없이 대답한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결혼하고 첫 애를 낳자마자 석 달 후에 불임수술을 했습니다.
  

Q. 그럼 그렇게 해서 몇 명의 자녀를 두셨는지요?

A. 저를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는 모두 다섯 명입니다.

제가 낳은 19살 첫아들 명곤이, 그리고 입양한지 10년 된 17살짜리 희곤이, 막내 귀염둥이 3살 하선이, 그리고 영범이 영환이 형제까지 모두 다섯 명이에요.

영범이 영환이 형제는 친생부모가 입양동의서에 싸인을 하지 않고 연락이 끊겨 입양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Q.  입양한 아이들이 아닌가요?

A 네, 두 형제는 부모가 있긴 하지만 해체가정이고 행방불명인 아버지와 도저히 아이들을 키울 수 없는 상태인 어머니가 있지요.

기본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였으며  보육원으로 보내질 경우 상당히 문제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영구적인 가족이 되어주자는 남편의 제안을 받고 자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Q. 힘드시겠어요.

A. 힘들기야 하지요. 그러나 힘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있다면 " 남의 자식 키우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정말 좋은 일 하시네요. " 하는 말이죠. 그렇게 물어오면 아직도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구나 싶어서 서글프지요.


Q. 한국입양홍보회 한국지부 공동회장을 맡고 계시는데요, 단체에 대한 소개를 좀 해주세요.  

A. 영어 약자로 MPAK(엠펙)이고  본 회는 한국에서의 입양을 홍보 장려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습니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이 그들의 마음과 가정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본 회의 목적입니다. 매년 수백 명의 아이들이 미국과 유럽의 가정들에 입양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외 입양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많은 수의 아이들이 입양되지 못한 채 고아원 같은 시설에서 성장하게 되는 실정입니다. 누가 이 아이들을 도와야 할까요? 이들을 위하여 마음과 가정을 여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책임입니다.

 
Q.얼마 전에 '제1차 전국 양부모대회'를 개최하셨는데요, 그 의의를 설명해 주시겠어요?

A. 10월 14일 경기도 과천 시민회관 대극장에서 한국입양홍보회(MPAK) 주최로 제1차 전국 양부모대회가 열렸지요.

이 대회는, 국내입양'과 '공개입양' 운동을 펼쳐온 우리 단체가  공개적으로'입양 행복'을 알리는 뜻 깊고 감격스런 대회였답니다. 공식적으로 입양이 시작된지 45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 입양된 아동은 56,000여명이 됩니다.

그리고 매년 1700여명이 입양되는데 공개입양은 총230가족에 불과한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만큼 국내입양은 비밀입양형태였고 인식도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우리 단체는 입양의 부정적인 인식변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입양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건강하고 아름다운입양가정이 알려짐으로 입양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비밀입양형태에서는 입양가정끼리의 접촉이 불가능하게 되는데 현재와 같은 어려운 입양 현실에서 입양가정이 모여 기쁨과 고민을 말하고, 입양사례를 나누고 격려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자신들의 경험이 아동을 위한 입양을 확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지요.

우리 나라의 입양문화가 비밀입양에서 공개입양으로 바뀔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 동안 부모위주의 입양이었다면 앞으론 아동을 위한 입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Q. 처음 입양을 결정하고 실행해 옮기실 때 주위의 반대는 없었나요? 남편, 시부모, 친척 등 여러분이 반대하셨으리라 추측되는데요.

A. 입양을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가까운 순서대로 반대를 하게 되는데 저도 그랬습니다.

저의 약속이행 요구에 남편은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생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차일피일 입양이 미루었습니다.

시댁어른들도 무슨 뚱딴지같은 생각이냐고 나무라시고 결국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초조해졌고 생각다 못해 처해진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 며 87년에 114를 통해 집에서 가까운 고아원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고아원 봉사부터 시작했어요.

희곤이는 그 고아원에서 가장 어린데다 볼품없이 생긴 네 살짜리 남자아이였는데 특별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계속적인 입양요청에 시부모님으로부터 어리고 예쁜 딸을 입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 원했던 거라 좋아서 입양기관을 찾아가고 서류를 준비하면서 희곤이가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입양하면 찾아가기 힘들텐데, 그 아이는 왜 안 되는 걸까.

만나고 오는 날이면 몹시 괴롭고 눈물만 났습니다. 아이가 필요해서 입양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3개월 동안 울면서 남편을 졸랐습니다. 남편은 어림없는 말이라고 거절하고 시댁 어른들껜 차마 말도 못 꺼냈습니다.

견디다 못해 남편이 총무님께 입양을 허락해 달라고 말했을 때 고아원 총무는 조금 더 기다리면 예쁘고 괜찮은 아이를 소개해 주겠다며 반대했지요. 우리부부의 간곡한 부탁에 총무님은 불가능할거라며 보름정도 데려가도 좋다는 긴 외출허락을 받았습니다.

전 그것이 곧바로 우리 아들이 되는 것으로 알았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즐거워 펑펑 울었습니다.  애를 데려오고 일주일 동안은 시부모님에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들의 반응이 너무 두려워서 매일 씻기고 말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죠.  그러다 남편 생일날, 아이를 시댁에 데리고 갔습니다.

수상하게 여긴 시아버님이 방으로 부르셨고 입양하고 싶어서 데려왔는데 허락을 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자 대뜸 시아버님이, " 상처받기 전에 어서 보내라. 앞으로 입양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 하고 단호히 반대하셨어요.

하지만 삼일 후 다시 찾아 뵈었을 때  " 너희들이 원한다면 할 수 없다만...  예쁜 여자애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허락해 주셨지요. 눈치가 빤한 일곱 살 양 손자를 받아들이느라 맘 고생 많이 하셨죠.

셋째를 입양할 때에는 IMF 때였고 남편은 절대 안 된다고 펄펄 뛰었죠. 특별히 경제적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 아이를 책임질 수 있냐고 말이죠. 어렵게 남편이 허락하고 입양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는데 시댁어른들이 완강히 반대하셨어요.  

불투명한 경제상황, 입시를 앞둔 아이들, 사십이 넘은 우리 나이들, 연로하신 부모님 등 대단했죠. 한번 했으면 되지 않았냐고 혼내키셨죠. 하지만 입양 후 하루만에 아주 만족해 하셨어요. 지금은 너무나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죠.  

  
Q. 아줌마들에게 입양에 대해 한 말씀해 주세요.

A. 입양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자녀를 입양이라는 형태로 얻어 양육하는 것입니다. 부모입장에선 가볍게 자녀를 얻는 입양이, 가정이 필요한 아이한테는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사회를 이루는 최소단위를 가정이라고 한다면 그 최소단위가 생략된 상태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온전하게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Q. 양부모로서, 그리고 앞으로 양부모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과 사회에 바라는 점은?  

A. 입양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입양을 원하는 가정들이 입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전반적인 제도보완이 시급합니다.

입양은 자국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최선이며 그 다음이 국가를 초월해서 국외로 입양되어야 합니다.

장애입양아에 대한 충분한 의료비지원과 입양 수속료 지원, 입양의 달 제정, 초등학교 교과서에 입양을 실어 가르치는 문제, 입양휴가, 돌보지 않는 아동의 친권문제, 출생신고문제, 적극적인 입양홍보 등을 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사회적으로도 입양의 절실한 필요성을 알리는데 책임감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입양은 입양부모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인식도 아주 중요합니다. 입양아에 대한 편견이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합니다. 많은 분들은 입양이 알려질 경우 불이익을 받게 될까 염려하고 계십니다.

누구한테 태어났느냐 보다 어떻게 자랐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가정이며 부모입니다. 이미 입양된 아동은 버려진 불쌍한 아이가 아닙니다.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우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아이들은 너무나 소중하고 어른들의 보살핌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없이 자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이 매년 7000여명 발생하고 있고 이중 2500여명은 해외로 1600여명은 국내로 입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3000여명은?

해외로 가는 2500여명 중에는 상당수가 장애아들입니다. 국내입양에 대한 대책 없이 해외입양을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국가를 초월하여 가정에서 클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가정을 열어 아이를 자녀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입양욕구가 잠재되어 있는 바로 당신입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이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A. 현재 엠펙은 전국에 다섯 군데의 양부모모임이 있고 11월11일엔 대구에서도 양부모모임을 갖게 됩니다.

지역별 양부모모임은 서로간 정보교환과 친목 등에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3개월 간격으로 모이고 있고 앞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구상중입니다.

그리고 매년 전국 양부모대회를 개최하여 대외적으로 입양을 홍보하고 서로 힘을 합하여 입양절차를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정부에 건의도 할 것입니다.

입양 가정이야기 책자와 인터넷(www.mpak.co.kr)을 통해 활동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소식지도 발간하여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의 대변인으로 입양의 편견을 없애고 국내입양을 활성화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한연희님을 인터뷰하면서, 저 스스로를 나무랐습니다.

언제나 말로만 입양 수출 세계 1위인 우리나라의 한심한 현실을 탓하고, 불쌍한 아이들을 우리가 맡아야 한다고 떠들어댔지만, 실제로 제가 나서서 한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지요.

예전에 아줌마닷컴에서 '나는 부모가 없는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가?'라는 설문 조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마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가 득표율 62%를 차지했었지요. 그 결과를 보고 다른 아줌마들도 다 나와 같은 마음이구나, 은근히 마음을 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내 자신이 지금 몹시 부끄럽습니다. 이제라도 나부터,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만 하는지, 곰곰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2000년 11월06일